정말로 선물같은 어린이 정루호는 모든 면이 꿈꾸던 어린이상 그대로인 적이 많다. 동생을 사랑하고 귀여워하는 모습도 그런데 다만 동생을 대하는 말투가 지나치게 무서울 때가 있어 종종 주의를 주곤 한다. 며칠전에 청계산기도원에 같이 갔는데 각자 기도할 시간에 기도제목을 물어보니 세 가지 기도제목 중에 하나가 예호한테 부드럽게 말하기라며 기도하는 루호였다. 내 아들이 아니라 주신 선물이라고 여기며 말하건데 참으로 인성이 괜찮은 어린이다.
'10[2020]'에 해당하는 글 38건
- 2020.05.08 형노릇
- 2020.05.08 2020 어린이날과 연휴
- 2020.05.08 예호의 보험가입
- 2020.04.21 솔이's day
- 2020.04.20 발레 교습
- 2020.04.14 코로나 일상
- 2020.04.14 수퍼히어로
- 2020.04.14 이히히히
- 2020.04.14 예인이 형원이와 마지막 주일
- 2020.04.14 코로나 전 마지막으로 했던 일들
올해의 거의 유일한 연휴인 4월말-5월초 연휴와 어린이날까지 그나마 코로나 바이러스가 주춤해져서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그렇다고 아무곳에나 갈 수 없어서 연휴와 어린이날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이 많았다. 혹시나 연휴에 배송이 지체될까 선물들을 미리 배송하거나 직접 가서 구매할 수 있는 것으로 정했다. 덕분에 아이들과 함께 가고 싶었던 데카트론 매장도 가보고 처음으로 스타필드나 트리플스트리트 같은 쇼핑몰에도 갔다. 잠을 못자 기운이 없다가도 쇼핑몰에 가니 기운이 솟아났다.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계셔서 여전히 부족한 것 없는 어린이날이 된 것 같아 행복했다.
예호는 태어날 때 치룬 난리에 비하면 아픈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일 정도로 활발하고 활동적이다. 문득문득 감사해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예호의 지금 모습이나 실제로 혹이 사라진 사실과는 달리 자꾸만 태어날 때를 상기시켜주는 것이 있었으니 하나는 정기 검진이고 다른 하나는 보험이었다.
나뿐 아니라 가족의 누구 하나 보험을 들지 않았었는데 예호의 일을 겪으며 온가족이 보험을 들게 되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속이 망가진다는 것을 그때 확실히 알게 되었고 배가 아파 잠들 수 없을 정도의 밤을 몇 번 겪으며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예호는 보험을 들 수 없었다. 태어날 때 발견된 심장의 혹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진단이나 입원 혹은 수술 없이 일정 시간을 지나게 되면 유병자보험을 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그게 올해 4월이었다. 비록 조금 다른 보험이고 보험료도 조금 비싸지만 그래도 보험을 들 수 있다는 게 건강하다는 증명 같아 감회가 남달랐다. 건강하다는 걸 확신하고 유아세례를 받았던 그 날처럼 안심하게 되는 인증을 받는 것 같았다. 날이 갈 수록 예호의 활동력은 더 높아지는 것 같다. 때때로 어떻게 저렇게 계속 뛰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심장의 크기와 별반 다를 것 없던 심장의 혹을 생각하면 그 놀라움은 더 커진다.
솔이의 두번째 생일날 호호형제와 함께했다.
오빠 노릇에 지나치게 심취한 예호는 생일케이크의 초 앞에서는 오빠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촛불을 끄려하고 이를 미리 눈치 챈 루호가 예호 입을 틀어막아버리는 것이 킬링포인트.
코로나로 그동안 가장 좋아하는 발레조차 할 수 없던 루호는 4월들어 개인교습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스튜디오로 내려가는 모습이나 나올 때의 모습을 보면 루호가 얼마나 발레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땀에 젖은 채 여흥이 가시지 않은 몸짓으로 푱푱 뛰며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재미있었어?' 물으면 '응,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이라고 대답한다.
내가 하던 일들을 그만 두고 지금의 일을 시작했을 때 그래서 전보다 더 심한 경제적인 두려움이 찾아오기 시작했을 때 가장 큰 두려움은 루호가 발레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때 즈음 발레트리니티의 선생님들을 만나고 늘 배려속에서 발레수업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행복하게 발레를 할 수 있었다. - 발레 트리니티에 간 뒤로는 그 전처럼 옮겨오기 전 학원 얘기를 하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며칠전 발레트리니티를 통해 동국대 교수님이 지정 장학금을 루호에게 주기로 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뭔가 그냥 간단히 '감사합니다.'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다.
나는 대학에 가기 전까지 장학금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성적이 그 정도로 좋은 적이 없었던 이유가 있기도 했겠지만 또 그만한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부족한 게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하필 IMF시절, 아버지가 막 명예퇴직을 한 직후에 대학을 간 나에게 등록금을 알아서 마련해야 한다는 사실은 좀 낯선 현실이었다. '대학가면 학비가 전부 다 나오니까 열심히 공부해라.'라는 학창시절 내내 들었던 아버지의 동기부여는 마치 피싱사기를 당한 것을 인지한 순간처럼 싸늘한 약속이 되었다. 다행히 나는 그 때 즈음부터 공부라는 것에 재미를 붙여보고 대학원이라는 과도한 욕심에 대가를 치루기 위해 학교 일을 하며 장학금을 받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장학금은 우수한 학생이 받는 것이라기 보다는 학자금대출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 같은 것이었다. 내가 장학금을 받는 것이, 아니 받아야만 했던 것이 아버지는 과연 기쁘기만 했을까? 루호가 장학금을 타니, 그리고 발레를 계속할 수 있으니 더 없이 기쁘고 다행스럽다. 그러나 장학금을 타야만 하니 아비로서는 자꾸만 부끄러워진다. 아직도 나는 내 능력을 믿고 있는 것일까?
장학금 소식을 들은 다음날 함께 수업받는 동생이 오지 않아 루호는 혼자 수업을 받았다. 아직 어떤 가능성도 잘 보이지 않을 작은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보며 지난 밤 우리보다 더 기뻐하며 장학금 소식을 전해주고 축하해 주던 선생님들을 생각했다. 경외심과 존경심과 부끄러움이 겹친 어떤 감정이 그들을 대하는 마음과 자세를 조심스럽게 고쳐준다. 자기의 자리에서 모든 역량으로 선한 사업을 하는 사람. 자신이 받은 것으로 꽃피우고 다른 꽃을 피우는 사람. 일상이 그 기쁨과 열정으로 가득찬 사람. 그런 선생님들을 만난 루호가 정말 발레리노가 된다면 그건 참 멋질 것 같다. 발레보다 귀한 것을 사사받고 있으므로.
코로나로 감금 된 일상 가운데 봄이 찾아왔다.
볕이 좋은 날엔 마당에 나가 일광욕을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내녀석들은 에너지가 남아 밤에 잠을 설치곤 하니까.)
간이의자를 펴고 커피를 마시며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더 바랄게 없다. (더 바랄 수도 없이 금새 예호는 달라붙어서 이거 꺼내달라 저거 꺼내달라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하니까.)
다행히 파이디온과 발레수업은 다시 시작되어서 형아가 파이디온에 간 사이에 예호는 뒷산에 올라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고양이에 심취한 녀석은 고양이처럼 땅을 파며 놀고 조금씩 손과 옷은 흙투성이가 되어가지만 왠지 그게 그나마 다행스러워 차마 말리지 못했다. 신기하게 옷에 뭍은 흙먼지들은 계속 뛰어다니니까 제법 사라져버렸다.
언젠가 루호가 공주옷 말고 아이언맨 옷이 입고 싶다고 해서 재빠르게 해외직구로 구입한 아이언맨 수트. 너무 커서 흘러내리듯이 몇 번 입고 말았는데 이제야 원래 수트처럼 잘 맞는다. 스파이더맨을 제일 좋아하는 예호는 거미줄을 발사중이다.
밥 먹었어?
여느 때처럼 예배 중간 시간에 만나 인사를 나누는데 벨기에로 떠나기 전 마지막 만남이라는 사실에 갑자기 어떻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뭘 어떻하긴 어떻하나 그냥 잘다녀와 인사를 해야지. 매주 반복되던 인사가 이렇게 갑자기 뚝 끊긴다는 게 여간 이상한 게 아니다. (더 기묘한 것은 벨기에에 가지 않았어도 코로나 때문에 인사는 뚝 끊겼을 거라는 사실.)
물론 그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지만,
쇼핑 센터에 다니고 영화도 보고 교회에 갔다가 눈이 내린 공원에서 놀며 사진찍고. 이런 일상을 하염없이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