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그동안 가장 좋아하는 발레조차 할 수 없던 루호는 4월들어 개인교습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스튜디오로 내려가는 모습이나 나올 때의 모습을 보면 루호가 얼마나 발레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땀에 젖은 채 여흥이 가시지 않은 몸짓으로 푱푱 뛰며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재미있었어?' 물으면 '응,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이라고 대답한다.
내가 하던 일들을 그만 두고 지금의 일을 시작했을 때 그래서 전보다 더 심한 경제적인 두려움이 찾아오기 시작했을 때 가장 큰 두려움은 루호가 발레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때 즈음 발레트리니티의 선생님들을 만나고 늘 배려속에서 발레수업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행복하게 발레를 할 수 있었다. - 발레 트리니티에 간 뒤로는 그 전처럼 옮겨오기 전 학원 얘기를 하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며칠전 발레트리니티를 통해 동국대 교수님이 지정 장학금을 루호에게 주기로 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뭔가 그냥 간단히 '감사합니다.'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다.
나는 대학에 가기 전까지 장학금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성적이 그 정도로 좋은 적이 없었던 이유가 있기도 했겠지만 또 그만한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부족한 게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하필 IMF시절, 아버지가 막 명예퇴직을 한 직후에 대학을 간 나에게 등록금을 알아서 마련해야 한다는 사실은 좀 낯선 현실이었다. '대학가면 학비가 전부 다 나오니까 열심히 공부해라.'라는 학창시절 내내 들었던 아버지의 동기부여는 마치 피싱사기를 당한 것을 인지한 순간처럼 싸늘한 약속이 되었다. 다행히 나는 그 때 즈음부터 공부라는 것에 재미를 붙여보고 대학원이라는 과도한 욕심에 대가를 치루기 위해 학교 일을 하며 장학금을 받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장학금은 우수한 학생이 받는 것이라기 보다는 학자금대출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 같은 것이었다. 내가 장학금을 받는 것이, 아니 받아야만 했던 것이 아버지는 과연 기쁘기만 했을까? 루호가 장학금을 타니, 그리고 발레를 계속할 수 있으니 더 없이 기쁘고 다행스럽다. 그러나 장학금을 타야만 하니 아비로서는 자꾸만 부끄러워진다. 아직도 나는 내 능력을 믿고 있는 것일까?
장학금 소식을 들은 다음날 함께 수업받는 동생이 오지 않아 루호는 혼자 수업을 받았다. 아직 어떤 가능성도 잘 보이지 않을 작은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보며 지난 밤 우리보다 더 기뻐하며 장학금 소식을 전해주고 축하해 주던 선생님들을 생각했다. 경외심과 존경심과 부끄러움이 겹친 어떤 감정이 그들을 대하는 마음과 자세를 조심스럽게 고쳐준다. 자기의 자리에서 모든 역량으로 선한 사업을 하는 사람. 자신이 받은 것으로 꽃피우고 다른 꽃을 피우는 사람. 일상이 그 기쁨과 열정으로 가득찬 사람. 그런 선생님들을 만난 루호가 정말 발레리노가 된다면 그건 참 멋질 것 같다. 발레보다 귀한 것을 사사받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