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병상련이라는 말처럼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사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호호형제네와 솔이네는 마침 비슷한 시기에 이사를 하게 되었고 함께 기도하며 힘든 시간을 이겨냈다. 감사하게도 두 가정이 모두 행복한 결말을 맞았고 호호형제네 집에 이어 솔이네까지 이사를 마치고 둘러 모여 함께 기도를 했다. 힘들 줄 알고 서로의 고통을 나눠 질 수 있는 파트너를 주신 것 까지, 이번 이사 드라마는 참 치밀한 각본이었다.
'13[2023]'에 해당하는 글 21건
- 2023.09.12 고통 분담 파트너십
- 2023.09.07 이사 이야기
- 2023.09.06 봄 스케치
- 2023.09.06 예호의 불안에 대하여
- 2023.06.15 봄소풍
- 2023.06.15 콩쿨들
- 2023.05.18 봄의 예호
- 2023.05.18 걱정 혹은 희망
- 2023.05.18 독감
- 2023.05.18 농구 선생님
지난 몇 개월동안 너무나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결말이 해피앤딩이 아니었다면 이런 기록을 하지 못한 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드라마 같은 (그정도로 처절하고 긴장감이 넘쳤던) 새로운 집으로의 이사 이야기를 남겨본다.
+ 그 이전의 호호형제의 집 기록
우리의 첫 집은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작고 낡은 빌라였다. 그 집은 우리부부의 신혼집이었고 루호의 고향이기도 했다. 열 평도 안되는 작고 낡은 집이었지만 얼마나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행복과는 별개로 나는 그 집에서 눅록지 않은 삶을 많이 배워야 했다. 흔히 달동네 하면 인정이 넘칠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남들에게도 더 각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가진 걸 빼앗기기 두려운 마음에 골목에는 주차 문제나 쓰레기 문제 같은 하찮은 다툼이 많았다. 빌라 하수구가 막혀 물이 역류되어 화장실을 못가기도 하고, 한여름에는 신생아였던 루호가 너무 땀을 흘려서 지혜는 아기띠를 하고 지하철을 타고 빙글빙글 돌다가 퇴근하는 나를 만나 집에 돌아가곤 했고, 그러다가 폭우로 우면산이 무너지던 날은 집 뒷산도 무너져서 집까지 흙이 들이닥치는 건 아닌지 전전 긍긍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했지만 집주인은 집을 팔 거니 나가라고 했고 우리는 그 집을 떠나야 했다.
두 번째 집을 구하며 주택공사에서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프로그램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제약이 많았고 부랴부랴 집을 구해야 했다. 다 좋은 건 아니었지만 전처럼 높은 곳에 있지 않고 주차도 가까운 곳에 하는 집이어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약속을 어긴 이삿짐 센터 덕분에 이사 첫 날부터 마음이 상했었다. -오전에 한 건을 하고 왔는지 오후 늦게 와서는 대충 던져넣듯이 하고 가버렸다. 게다가 훔쳐간 물건도 있었다.- 주차를 하기로 한 자리에는 어떤 할아버지가 동네 쓰레기를 다 모아 놓은 바람에 차에는 날마가 기스가 생기고 쓰레기 국물이 흘렀다. 아랫층에는 중국인인지 중국동포인지 모를 사람들이 살았는데 열평도 안되는 집에 주말마다 스무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언성을 높이곤 했다. 2층에서는 새벽에도 노래방 기계를 틀고 노래를 해서 경찰을 대동하고 방문하기도 했다. 바퀴벌레는 얼마나 많은지 밤에 주방에 불을 켜면 사라락 도망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했지만 새로 바뀐 건물주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집을 부수어가며 수리 공사를 했고 우리는 고소를 하는 대신 그 집을 떠나기로 했다.
몇 년동안 만만치 않은 세상을 경험한 우리는 이제는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생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많은 집을 돌아다녀도 갈만한 집을 찾기는 너무 어려웠다. 우리는 가진 돈도 너무 적었고 주택공사의 조건에 맞추려면 더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도 그동안 집 때문에 고생한 것을 기억하며 더 간절히 기도를 했다. 그러다가 한 집을 찾았고 중개사를 따라 떨리는 마음으로 집을 보러 갔는데 중개사는 뭔가 미안한 듯 '이런 집이에요. 알고 왔죠?'하며 집을 보여줬다. 아마도 낡은 집인데도 수리를 하지 않아 사람들이 꺼려 했던 모양이었다. 그 집은 실제로 나 보다도 나이가 많고 제대로 열리는 창문이 거의 없을 정도로 수리를 하지 않은 집이었지만 우리에겐 충분한 집이었다. 내가 어릴적에 살던 집과 비슷해서 오히려 정겨웠다.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무늬가 들어간 유리, 삐그덕 거리는 나무로 된 벽,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다락방, 작지만 정겨운 마당 같은 것들이 빈티지한 멋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세 번째 이사를 해서 그 집에서 살게 되었고 예호는 그 집에서 태어났다. 우리에게 수 많은 기억들이 그 집에서 차곡차곡 쌓였고, 물론 전기가 나간다거나, 지하실에 물이차서 퍼내야 한다거나, 천장에서 물이 세거나 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아빠가 당연히 해야하는 역할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8년을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집주인 할아버지는 전기가 고장 나도 사람을 부르지 못하게 할 정도로 구두쇠였고 집을 수리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음이 확실했다. 화장실에 타일이 다 깨져서 흙이 나오기 시작하고, 비가 많이 오던 여름에 속절없이 비가 세서 전등 안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이제는 위험해서 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주택공사에서 빌린 돈을 갚을 때도 임박해서 이사를 가기로 결심하고 장기전세며 국민임대, 전세임대 같은 가능한 모든 청약을 넣게 되었다. 무주택 기간도 길고 아이도 둘이 있으니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첨이 된다고 해도 그 과정이 살고 있는 집의 임대계약 기간 안에 끝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래도 8년을 살았으니 몇개월 정도 더 사는 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큰 오산이었다. 집주인 할아버지-정확히는 그 아내분-은 들어와 살아야 하니 무조건 나가라고 했고, 아내가 수술한지 몇 개월 되지 않았다고 사정해봐도, 청약 당첨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을 얘기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갈 수도 없었다. 이사를 간 곳의 집주인이 양해를 해주지 않으면 당첨이 되어도 이사를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지만 모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우리는 이사비용이며 비싼 월세를 감당하더라도 몇개월 동안 단기계약을 해서 살 집을 구하기로 했다. 단기로 집을 계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번은 계약을 하기로 했다가 갑자기 파기를 당하기도 해서 가슴이 철렁 내려 앉기도 했다. 이사 나가야할 기간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6개월동안 살 집을 찾을 수 있었고 몇 가지의 치명적인 단점도 있었지만 그나마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사비용이며 원래 내던 것의 세배에 달하는 월세를 생각하면 집주인 할아버지를 고소할까 또 고민했는데 그걸 진행할 만한 정신도 의지도 없었다.
네 번째 집으로 이사를 했다. 아이들은 정든 집을 떠난다며 몇 번이나 울었다. 이삿짐을 나르던 아저씨는 왜 낡은 집으로만 이사를 다니냐며 하나도 웃기지 않은 농담을 했고 그사이 가파른 골목길에 힘겹게 주차한 사다리차는 부지런히 짐들을 올려주었다. 집앞 골목은 가파른 오르막이어서 눈이라도 오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아이들의 학교는 전보다 멀어진대다가 그 오르막길을 지나야 해서 힘들었다. 예호는 학교가는 길에 지나는 시장통에서는 몇 번이나 구역질을 하곤 했다. 스트레스로 예민해진 탓에 겪는 고생이었다. 주차할 곳이 없어서 전에 주차하던 곳에 차를 대고 십 분을 걸어다녀야 하는 생활을 다시 하게 되었다. 게다가 세 배가 넘는 월세를 내야 해서 때때로 전 집주인 할아버지를 고소하고 싶은 마음이 부글거렸다. 하지만 단기로 계약을 한 게 얼마나 다행이냐며 끓어 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그래도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예뻤고 서글서글한 집주인 분들이 아래에 살아서 안심이 되었다. 무엇보다 청약에 당첨이 되고 이사를 갈 수 있다면 그 모든 걸 넉넉히 감수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로 이사를 마치고 새로운 집에서 첫날 밤을 맞이 하기 전까지는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응당 그래야 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집을 주시는 일이 하나님에게는 간단한 일이고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마음으로 이 모든 과정을 감당하고 있으면서도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날까? 하는 마음-이라고 쓰고 의심이라고 읽는다-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1월 즈음에 한 군데 당첨 연락을 받았고 그 집은 우리가 넣은 청약 중에서 가장 원하던 곳이었다! 8년을 살았던 집 근처여서 자주 지나가곤 했던 아파트단지였다. 이런 곳에 살고 싶다는 마음도 감히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이 근처에서는 제일 좋은 곳이었고 동네에 이런 곳이 있어서 지나다니면서 참 좋다는 생각 정도만 했던 것 같다. 가끔 단지 크기가 비슷해서 내가 어릴 적 자라던 아파트 단지 생각을 하며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같다. 우리는 4월에 그 집으로 이사를 왔다. 쳥약 경쟁률이 이십몇대 일이었다는 것도, 보증금이 천만원만 높았어도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도, 전 집에서 이사 나오며 갚아야 했던 돈이 지혜의 암진단 보험금 만큼 이었다는 것도, 예비 1번으로 당첨이 되어서 단기 계약한 집에서 계약된 날짜에 딱 맞춰 이사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사가 완료되기 전까지는 불안 요소였지만 이사를 마치고 나자 맞춰진 하나님의 조각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출을 하기 위해 몇 달을 품고 다녔던 서류들과, 수 차례의 은행 방문에도 확답을 얻을 수 없었던 대출 모험기와, 주택공사 직원의 만행으로 이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이사 전날까지의 대혼란 등 그 당첨 후에도 이어진 모든 전쟁 같은 일들 또한 그렇다.)
아파트 단지를 처음으로 산책하며, 집집마다 켜진 전등을 보고 이 아파트에 사는 수많은 사람을 생각하며, 그 중에서 우리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차곡차곡 돈을 모아 여기 살기를 꿈꾸며 내 힘으로 이루었다면 -그것도 행복한 일이었겠지만- 이보다 간절하고 벅찰 수 있었을까? 아마 그랬다면 하나님이 하셨음이 더 분명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루호는 처음으로 생긴 자기 방을 마음껏 꾸미며 행복해 했고 사실은 오래 산 집에서 이사 가야 해서 너무 슬펐다고 털어놨다. 예호는 여전히 자기가 태어나 산 집이 제일 좋았노라고 말하지만 자기방은 야무지게 치우고 불안해서 구역질하는 증상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지혜는 이가 나간 밥그릇을 새 것으로 채워 넣으며 신혼 때에도 느끼지 못한 주방 정리의 기쁨도 맛보고 있다. - 신혼집으로 이사 갔을 때 싱크대를 바꿔주기로 한 집주인이 상부장은 그대로 두고 아래 싱크만 바꿔줬던 비정함(?)에 서로워 울었던 기억이 있다. - 나는 차를 몰고 아파트로 들어갈 때마다 차단기가 열리기 전까지 찰나에 순간에 혹시 '이게 꿈일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 '입주민 차량'이라는 문구와 함께 차단기가 열리면 '임마누엘'을 중얼거리며 들어간다. 게다가 내가 돈 주고 산 진짜 내 집이 아니라 더 좋다. 다들 자기 집을 사고 싶어하는 게 당연하지만 사역한다고 하면서 아파트에 산다고 누군가 시험에 들 걱정 안해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매일 감동하여 감사하는 것이 끊어지지 않으면 좋겠다. 어린시절 아파트에서의 기억이 나에게 여전한 평온을 주는 것처럼, 호호형제에게도 그런 집이 되면 좋겠다. 아이들이 다 클 때까지.
예호는 늘 활달하고, 놀이터에 놀러 가도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 정도로 붙임성도 좋아보이고, 늘 거침없어 보여서 관계에 대해서 걱정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새로운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 중에 학교에서의 생활이 어려움을 알게 되었고 결국 직접 학교로 찾아가 상담까지 하게 되었다.
엄마의 몇 번의 수술과 병원생활, 태어나 지금까지 살던 집에서의 갑작스런 이사, 새로운 학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린 예호에게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활달하다고 예민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예호가 나를 닮아 예민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한 것 같다. 사실 몇개월 전부터 냄새에 민감해져 갑작스럽게 구역질을 하는 일이 많아져 음식점에서 밥을 못 먹은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학교 급식 먹기도 힘들어 해서 비닐을 싸가지고 다니며 구역질이 날 때 사용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학교를 가는 길에 시장을 지나는데 그 시장통을 지날 때 몇 번이고 구역질을 한다.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힘들고 게임을 하거나 규칙이 있는 일을 할 때 과잉행동을 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예호의 쾌활함 속에 가려진 마음 속 무거운 짐들을 그동안 보지 못했나보다.
충분한 사랑을 준 것 같은데 더 사랑이 필요한 아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드러내는 법도 모르겠지만) 혼자서 힘들어 했을 시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처음으로 뭐랄까 뒷바라지의 두려움을 느꼈다.
발레에 있어서 가까스로 외면하던 교만함이 드디어 찾아오는 것인가 싶어서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은 그저 긴 여정의 하루, 나는 그저 아직 어린 루호의 스케쥴을 도울 뿐이다.
아빠는 그저 너를 여기 태워다 주고 콩쿨이 끝나면 짜장면을 사주는 것 정도 밖에 할 수 없단다.
오늘은 문득 사진도 잘 찍어주고 싶어서 카메라도 들고 왔는데 걸리적거리고 무겁다.
루호가 잘 해서 좋은 상을 받아도 선생님의 공이 더 큰 게 아닐까.
나는 루호의 전 생애를 위해 나에게 맡긴 역할을 다시 생각해 봤다.
루호의 길은 내가 아닌 루호의 일생을 통해 보여주실 것이다.
나는 그저 태워다 주고 짜장면을 사주면 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많은 걱정을 하며 살아간다. 우리 가족에게도 많은 걱정이 있다. 나만 홀로 걱정을 짊어지면 되는 줄 알았는데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아이들을 포함한 모두가 저마다의 고통을 견뎌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늘 의젓한 루호는 늘 그런 모습을 지키기 위해 애쓰느라 더욱 힘들고, 고민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예호도 천진난만해 보이는 뒷면에 고통을 숨기고 있었다. (적응 문제로 학교에 가서 상담을 해야 했고, 간헐적으로 구역질을 해서 늘 비닐 봉지를 가지고 다닌다. 스트레스로 인한 그토는 나도 잘 안다. 내가 어릴 적에 내과와 이비인후과를 거쳐 정신과에도 다녔을 정도로 구토를 했었으니까. 늘 해맑은 예호가 불안으로 힘들어 한다는 게 더 가슴이 아프다.) 지혜는 잠못 이루는 밤이 많아 힘들어 하고 있다.
하지만 걱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때로 고난을 주실지언정 걱정은 온전히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게다가 걱정은 하나님이 주신 희망을 가린다.
우리 가족에게도 큰 희망이 있다. 사실 걱정으로 희망을 온전히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을 걷어내고, 희망으로 벅차하고 기뻐하고 열심을 내는 것, 그것이 희망을 주시는 이가 기다리는 것임을 깨달아 간다.
멀지 않은 곳으로 소풍을 가려고 나섰다가 진새골이란 곳에 가게 되었다. 교회가 있고 겔러리와 카페도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 생각치도 못한 멋진 풍경을 마주했다. 잠시 가족이 모여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느껴보려 애썼다. 고민으로 가려졌던 희망을 마주하는 것처럼, 산등성이로 해가 저물어가며 생기는 멋진 노을을 본다.
마스크를 벗으면서 그동안 걸리지 않았던 질병에 걸리기 시작했고 독감이 우리 가족에게 찾아왔다.
첫번째로 예호가 앓고 조금 회복되었을 때 동네 뒷산으로 산책을 갔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내가 앓기 시작했다.
농구를 돈을 주고 시키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예호는 즐겁게 농구를 하고 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선생님 덕분에 그래도 덜 아까웠는데 선생님이 군대를 간다고 하여 마지막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이들의 장난스런 표정이 선생님이 그동안 주었던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