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많은 축하로 행복한 루호의 생일
발레해서 행복한 정루호
우리가 살던 집은 나보다도 나이가 많았지만 불만이 있기는 커녕 감사함으로 가득찬 집이었다. 그래서 집의 이름도 마레(충만)하우스라고 짓고 살았다. 루호가 아주 어렸을 적, 예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사를 와서 벌써 8년을 살았다. 호호형제에게는 아마도 '우리집'이란 곧 8년동안 살았던 이 집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 집에서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사를 하게 된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만 아이들이 이해하기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할 것이다. 생각보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지만 어차피 곧 떠나야만 했을 집이라는 건 분명했다. 이사를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자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모든 추억이 다 담겨있는 집을 떠나야 한다는 건 아이들에겐 어쩌면 청천벽력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집을 보았을 때 집앞 길에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싱그러웠고, 흔하지 않은 다락방은 아이들의 자랑이 되었으며, 신경쓰지 않고 마구 뛰어놀아도 되는 것이 두 남자 아이들에게 더 없이 좋았다. 좁은 마당이지만 인조잔디를 깔고 여름이면 튜브에 바람을 넣어 수양장을 펼쳐 준 것도 아이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락방은 아이들이 올라가기에도 좁고, 작은 수영장을 펼치고 놀기에도 아이들은 너무 커버렸다.
집을 비우고서야 정말로 이렇게 낡은 집이었나 싶다. 그동안 포근하고 든든했던 기분은 온데간데 없고 앙상하고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잘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는 창문 틈새로는 겨울바람이 들이닥칠 것이고, 타일이 다 깨져버린 화장실은 곰팡이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너무나 행복했던 집이다. 정말 좋은 집은 어떤 집일까?
코로나로 중지 되었던 학교 행사들이 하나 둘 다시 시작되려 한다. 예호는 처음으로 운동회를 경험했다. 즐거운일이 많은 학교생활이 되기를!
집주변에 어떤 아이가 담배꽁초를 버리지 말자는 쪽지 여러장을 손수 그려서 붙여 뒀길래 대견하고 귀엽다고 생각을 헀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루호가 한 거라고?!!! 그런데 늘 담배꽁초로 가득하던 하수구에 담배꽁초가 줄었다. 쪽지를 보고는 차마 버리지 못한듯. 대단하다!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하고 공부방이기도 한 하품의 사무실이 이전했다. 예호는 여전히 처음 사무실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놀이터 앞이라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고, 루호는 입바른 말인지 새로 이사한 사무실이 너무 좋다 말해준다. 처음 사무실에 들어갈 땐 아무것도 없는 방에 책상과 책장만 채워 넣었었고, 첫 이사때는 용달트럭 한 대로 이사를 했는데 이제 대형 트럭 한 대로도 모자라 작은 트럭을 한 대 더불러야 할 정도록 살림이 많아졌다. 호호형제에게 또 추억이 한트럭 만큼 쌓이길.
여름동안 루호가 만나 발레리나, 발레리노들이 얼마나 유명하지도 모르고, 본 공연들도 나에겐 별 감흥이 없지만 가격으로 환산해 보거나 가격으로 얻을 수 없는 기회라는 얘기들을 듣고 있자니 루호에게 큰 축복임을 감사하게 된다.
*나중에 루호가 여름방학동안 한 일을 적어내려간 리스트들을 학교 숙제로 낸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리스트를 보니 굉장히 유복한 집 자제분의 방학생활 같은 느낌이었다. **발레라노 특강, **공연 관람 같은 목록들은 지난 다음에 보니 더 신기하더라.
일곱시에는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여덟시에는 비가 오기 시작했는데, 아홉시에는 대로에 계곡처럼 물이 흐를 정도가 되었다.
아마도 짧은 시간 내에 이렇게 비가 내린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비가 이렇게도 많이 올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쏟아 붓는데 이상하게도 그 상태에서 전혀 비가 잦아들지 않았다.
트라우마까지는 아니어도 어릴 적에 물난리를 겪은 기억 때문인지 조금씩 불안해하고 지하 발레홀에서 연습 중인 루호를 데려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전화가 왔다. 발레홀에 물이 차고 있다고.
이수역 사거리에 가기도 전에 차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반대편 차로에는 차가 한 대도 없는 이상한 풍경에 직감적으로 차를 돌렸다. 땅보다 낮은 곳은 물론이고 분명 땅보다 높은 곳인데도 물이 들이닥쳐 어쩔줄 몰라하는 사람들, 갈 때는 수건이며 쌓을 수 있는 것으로 물을 막았지만 돌아갈 땐 물이 차버린 체육센터, 집 앞 삼거리에 맨홀에서는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이 길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가까스로 지나간 길은 마치 강처럼 물이 흘렀다. 동네라서 나름대로 그나마 지나갈 수 있는 길들로만 돌아 중간에 루호와 지은이를 만나 태우고 돌아오기까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제 발레홀은 어찌하나 전화를 해보고 걱정을 해보지만 갈 수도 없고 이대로는 어디라도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어 전전긍긍하다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물이 찬 발레홀에서 돌아온 루호는 기도를 하다가 대성통곡을 했다. 발레를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인지 울음을 멈출 줄 몰랐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는데 길에는 버려둔 차들과 흙과 쓰레기들로 엉망이었지만 다니는 차가 없어서 쉽게 지나갈 수 있었다. 한시간만에 물이 차오르고 난리가 났던 곳이 불과 또 금방 물이 빠진 걸 보니 참 허망하다. 발레홀에는 더 허망한 표정으로 선생님이 다 젖어버린 물건들을 씻고 계셨다. 걸레받이의 실리콘 사이로 계속 물이 나왔다. 여기 가득 들어찼던 물이 아직 아래 남아 흐르는 것이다. 나무로 된 발레홀 바닥은 이제 어쩌나? 이게 몇 시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인데 참으로 허망하다. 계속 나오는 물을 퍼다 버려도 참, 허망하다.
며칠동안 버려진 차들이 곳곳에 그대로 놓여 있었고 물에 젖은 물건들이 길가에 나와 있기도 했지만 세상은 언뜻 전과 다름 없어 보였고 발레홀도 어찌어찌 다시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일로 루호의 마음은 조금 더 간절해졌을까? 울며 기도한 응답이 있다고 느끼고 있을까? 물난리처럼 또 기도해야할 일들 앞에서 늘 신뢰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 요즘 유행하는 스티커사진을 찍어보았다. 루호가 늘 찍고 싶다고 했는데 이번에 기분을 내 본 것이다. 함께 모여 웃어본다. 허망한 일들 가운데 우리의 웃음이 서로를 다시 세워준다.
아이들이 한 계절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고, 특히 여름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늘 일상은 눅록치 않고 이번 여름도 그렇다.
그런 와중에도 물을 즐길 수 있고 또래들을 만나 노는 시간이 그래도 좋은 여름이었다고 기억하게 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