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개월동안 너무나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결말이 해피앤딩이 아니었다면 이런 기록을 하지 못한 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드라마 같은 (그정도로 처절하고 긴장감이 넘쳤던) 새로운 집으로의 이사 이야기를 남겨본다.
+ 그 이전의 호호형제의 집 기록
우리의 첫 집은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작고 낡은 빌라였다. 그 집은 우리부부의 신혼집이었고 루호의 고향이기도 했다. 열 평도 안되는 작고 낡은 집이었지만 얼마나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행복과는 별개로 나는 그 집에서 눅록지 않은 삶을 많이 배워야 했다. 흔히 달동네 하면 인정이 넘칠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남들에게도 더 각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가진 걸 빼앗기기 두려운 마음에 골목에는 주차 문제나 쓰레기 문제 같은 하찮은 다툼이 많았다. 빌라 하수구가 막혀 물이 역류되어 화장실을 못가기도 하고, 한여름에는 신생아였던 루호가 너무 땀을 흘려서 지혜는 아기띠를 하고 지하철을 타고 빙글빙글 돌다가 퇴근하는 나를 만나 집에 돌아가곤 했고, 그러다가 폭우로 우면산이 무너지던 날은 집 뒷산도 무너져서 집까지 흙이 들이닥치는 건 아닌지 전전 긍긍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했지만 집주인은 집을 팔 거니 나가라고 했고 우리는 그 집을 떠나야 했다.
두 번째 집을 구하며 주택공사에서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프로그램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제약이 많았고 부랴부랴 집을 구해야 했다. 다 좋은 건 아니었지만 전처럼 높은 곳에 있지 않고 주차도 가까운 곳에 하는 집이어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약속을 어긴 이삿짐 센터 덕분에 이사 첫 날부터 마음이 상했었다. -오전에 한 건을 하고 왔는지 오후 늦게 와서는 대충 던져넣듯이 하고 가버렸다. 게다가 훔쳐간 물건도 있었다.- 주차를 하기로 한 자리에는 어떤 할아버지가 동네 쓰레기를 다 모아 놓은 바람에 차에는 날마가 기스가 생기고 쓰레기 국물이 흘렀다. 아랫층에는 중국인인지 중국동포인지 모를 사람들이 살았는데 열평도 안되는 집에 주말마다 스무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언성을 높이곤 했다. 2층에서는 새벽에도 노래방 기계를 틀고 노래를 해서 경찰을 대동하고 방문하기도 했다. 바퀴벌레는 얼마나 많은지 밤에 주방에 불을 켜면 사라락 도망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했지만 새로 바뀐 건물주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집을 부수어가며 수리 공사를 했고 우리는 고소를 하는 대신 그 집을 떠나기로 했다.
몇 년동안 만만치 않은 세상을 경험한 우리는 이제는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생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많은 집을 돌아다녀도 갈만한 집을 찾기는 너무 어려웠다. 우리는 가진 돈도 너무 적었고 주택공사의 조건에 맞추려면 더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도 그동안 집 때문에 고생한 것을 기억하며 더 간절히 기도를 했다. 그러다가 한 집을 찾았고 중개사를 따라 떨리는 마음으로 집을 보러 갔는데 중개사는 뭔가 미안한 듯 '이런 집이에요. 알고 왔죠?'하며 집을 보여줬다. 아마도 낡은 집인데도 수리를 하지 않아 사람들이 꺼려 했던 모양이었다. 그 집은 실제로 나 보다도 나이가 많고 제대로 열리는 창문이 거의 없을 정도로 수리를 하지 않은 집이었지만 우리에겐 충분한 집이었다. 내가 어릴적에 살던 집과 비슷해서 오히려 정겨웠다.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무늬가 들어간 유리, 삐그덕 거리는 나무로 된 벽,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다락방, 작지만 정겨운 마당 같은 것들이 빈티지한 멋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세 번째 이사를 해서 그 집에서 살게 되었고 예호는 그 집에서 태어났다. 우리에게 수 많은 기억들이 그 집에서 차곡차곡 쌓였고, 물론 전기가 나간다거나, 지하실에 물이차서 퍼내야 한다거나, 천장에서 물이 세거나 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아빠가 당연히 해야하는 역할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8년을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집주인 할아버지는 전기가 고장 나도 사람을 부르지 못하게 할 정도로 구두쇠였고 집을 수리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음이 확실했다. 화장실에 타일이 다 깨져서 흙이 나오기 시작하고, 비가 많이 오던 여름에 속절없이 비가 세서 전등 안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이제는 위험해서 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주택공사에서 빌린 돈을 갚을 때도 임박해서 이사를 가기로 결심하고 장기전세며 국민임대, 전세임대 같은 가능한 모든 청약을 넣게 되었다. 무주택 기간도 길고 아이도 둘이 있으니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첨이 된다고 해도 그 과정이 살고 있는 집의 임대계약 기간 안에 끝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래도 8년을 살았으니 몇개월 정도 더 사는 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큰 오산이었다. 집주인 할아버지-정확히는 그 아내분-은 들어와 살아야 하니 무조건 나가라고 했고, 아내가 수술한지 몇 개월 되지 않았다고 사정해봐도, 청약 당첨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을 얘기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갈 수도 없었다. 이사를 간 곳의 집주인이 양해를 해주지 않으면 당첨이 되어도 이사를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지만 모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우리는 이사비용이며 비싼 월세를 감당하더라도 몇개월 동안 단기계약을 해서 살 집을 구하기로 했다. 단기로 집을 계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번은 계약을 하기로 했다가 갑자기 파기를 당하기도 해서 가슴이 철렁 내려 앉기도 했다. 이사 나가야할 기간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6개월동안 살 집을 찾을 수 있었고 몇 가지의 치명적인 단점도 있었지만 그나마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사비용이며 원래 내던 것의 세배에 달하는 월세를 생각하면 집주인 할아버지를 고소할까 또 고민했는데 그걸 진행할 만한 정신도 의지도 없었다.
네 번째 집으로 이사를 했다. 아이들은 정든 집을 떠난다며 몇 번이나 울었다. 이삿짐을 나르던 아저씨는 왜 낡은 집으로만 이사를 다니냐며 하나도 웃기지 않은 농담을 했고 그사이 가파른 골목길에 힘겹게 주차한 사다리차는 부지런히 짐들을 올려주었다. 집앞 골목은 가파른 오르막이어서 눈이라도 오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아이들의 학교는 전보다 멀어진대다가 그 오르막길을 지나야 해서 힘들었다. 예호는 학교가는 길에 지나는 시장통에서는 몇 번이나 구역질을 하곤 했다. 스트레스로 예민해진 탓에 겪는 고생이었다. 주차할 곳이 없어서 전에 주차하던 곳에 차를 대고 십 분을 걸어다녀야 하는 생활을 다시 하게 되었다. 게다가 세 배가 넘는 월세를 내야 해서 때때로 전 집주인 할아버지를 고소하고 싶은 마음이 부글거렸다. 하지만 단기로 계약을 한 게 얼마나 다행이냐며 끓어 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그래도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예뻤고 서글서글한 집주인 분들이 아래에 살아서 안심이 되었다. 무엇보다 청약에 당첨이 되고 이사를 갈 수 있다면 그 모든 걸 넉넉히 감수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로 이사를 마치고 새로운 집에서 첫날 밤을 맞이 하기 전까지는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응당 그래야 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집을 주시는 일이 하나님에게는 간단한 일이고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마음으로 이 모든 과정을 감당하고 있으면서도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날까? 하는 마음-이라고 쓰고 의심이라고 읽는다-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1월 즈음에 한 군데 당첨 연락을 받았고 그 집은 우리가 넣은 청약 중에서 가장 원하던 곳이었다! 8년을 살았던 집 근처여서 자주 지나가곤 했던 아파트단지였다. 이런 곳에 살고 싶다는 마음도 감히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이 근처에서는 제일 좋은 곳이었고 동네에 이런 곳이 있어서 지나다니면서 참 좋다는 생각 정도만 했던 것 같다. 가끔 단지 크기가 비슷해서 내가 어릴 적 자라던 아파트 단지 생각을 하며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같다. 우리는 4월에 그 집으로 이사를 왔다. 쳥약 경쟁률이 이십몇대 일이었다는 것도, 보증금이 천만원만 높았어도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도, 전 집에서 이사 나오며 갚아야 했던 돈이 지혜의 암진단 보험금 만큼 이었다는 것도, 예비 1번으로 당첨이 되어서 단기 계약한 집에서 계약된 날짜에 딱 맞춰 이사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사가 완료되기 전까지는 불안 요소였지만 이사를 마치고 나자 맞춰진 하나님의 조각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출을 하기 위해 몇 달을 품고 다녔던 서류들과, 수 차례의 은행 방문에도 확답을 얻을 수 없었던 대출 모험기와, 주택공사 직원의 만행으로 이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이사 전날까지의 대혼란 등 그 당첨 후에도 이어진 모든 전쟁 같은 일들 또한 그렇다.)
아파트 단지를 처음으로 산책하며, 집집마다 켜진 전등을 보고 이 아파트에 사는 수많은 사람을 생각하며, 그 중에서 우리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차곡차곡 돈을 모아 여기 살기를 꿈꾸며 내 힘으로 이루었다면 -그것도 행복한 일이었겠지만- 이보다 간절하고 벅찰 수 있었을까? 아마 그랬다면 하나님이 하셨음이 더 분명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루호는 처음으로 생긴 자기 방을 마음껏 꾸미며 행복해 했고 사실은 오래 산 집에서 이사 가야 해서 너무 슬펐다고 털어놨다. 예호는 여전히 자기가 태어나 산 집이 제일 좋았노라고 말하지만 자기방은 야무지게 치우고 불안해서 구역질하는 증상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지혜는 이가 나간 밥그릇을 새 것으로 채워 넣으며 신혼 때에도 느끼지 못한 주방 정리의 기쁨도 맛보고 있다. - 신혼집으로 이사 갔을 때 싱크대를 바꿔주기로 한 집주인이 상부장은 그대로 두고 아래 싱크만 바꿔줬던 비정함(?)에 서로워 울었던 기억이 있다. - 나는 차를 몰고 아파트로 들어갈 때마다 차단기가 열리기 전까지 찰나에 순간에 혹시 '이게 꿈일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 '입주민 차량'이라는 문구와 함께 차단기가 열리면 '임마누엘'을 중얼거리며 들어간다. 게다가 내가 돈 주고 산 진짜 내 집이 아니라 더 좋다. 다들 자기 집을 사고 싶어하는 게 당연하지만 사역한다고 하면서 아파트에 산다고 누군가 시험에 들 걱정 안해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매일 감동하여 감사하는 것이 끊어지지 않으면 좋겠다. 어린시절 아파트에서의 기억이 나에게 여전한 평온을 주는 것처럼, 호호형제에게도 그런 집이 되면 좋겠다. 아이들이 다 클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