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

12[2022] 2022. 9. 27. 14:11

일곱시에는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여덟시에는 비가 오기 시작했는데, 아홉시에는 대로에 계곡처럼 물이 흐를 정도가 되었다. 
아마도 짧은 시간 내에 이렇게 비가 내린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비가 이렇게도 많이 올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쏟아 붓는데 이상하게도 그 상태에서 전혀 비가 잦아들지 않았다. 
트라우마까지는 아니어도 어릴 적에 물난리를 겪은 기억 때문인지 조금씩 불안해하고 지하 발레홀에서 연습 중인 루호를 데려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전화가 왔다. 발레홀에 물이 차고 있다고.

이수역 사거리에 가기도 전에 차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반대편 차로에는 차가 한 대도 없는 이상한 풍경에 직감적으로 차를 돌렸다. 땅보다 낮은 곳은 물론이고 분명 땅보다 높은 곳인데도 물이 들이닥쳐 어쩔줄 몰라하는 사람들, 갈 때는 수건이며 쌓을 수 있는 것으로 물을 막았지만 돌아갈 땐 물이 차버린 체육센터, 집 앞 삼거리에 맨홀에서는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이 길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가까스로 지나간 길은 마치 강처럼 물이 흘렀다. 동네라서 나름대로 그나마 지나갈 수 있는 길들로만 돌아 중간에 루호와 지은이를 만나 태우고 돌아오기까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제 발레홀은 어찌하나 전화를 해보고 걱정을 해보지만 갈 수도 없고 이대로는 어디라도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어 전전긍긍하다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물이 찬 발레홀에서 돌아온 루호는 기도를 하다가 대성통곡을 했다. 발레를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인지 울음을 멈출 줄 몰랐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는데 길에는 버려둔 차들과 흙과 쓰레기들로 엉망이었지만 다니는 차가 없어서 쉽게 지나갈 수 있었다. 한시간만에 물이 차오르고 난리가 났던 곳이 불과 또 금방 물이 빠진 걸 보니 참 허망하다. 발레홀에는 더 허망한 표정으로 선생님이 다 젖어버린 물건들을 씻고 계셨다. 걸레받이의 실리콘 사이로 계속 물이 나왔다. 여기 가득 들어찼던 물이 아직 아래 남아 흐르는 것이다. 나무로 된 발레홀 바닥은 이제 어쩌나? 이게 몇 시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인데 참으로 허망하다. 계속 나오는 물을 퍼다 버려도 참, 허망하다. 

며칠동안 버려진 차들이 곳곳에 그대로 놓여 있었고 물에 젖은 물건들이 길가에 나와 있기도 했지만 세상은 언뜻 전과 다름 없어 보였고 발레홀도 어찌어찌 다시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일로 루호의 마음은 조금 더 간절해졌을까? 울며 기도한 응답이 있다고 느끼고 있을까? 물난리처럼 또 기도해야할 일들 앞에서 늘 신뢰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 요즘 유행하는 스티커사진을 찍어보았다. 루호가 늘 찍고 싶다고 했는데 이번에 기분을 내 본 것이다. 함께 모여 웃어본다. 허망한 일들 가운데 우리의 웃음이 서로를 다시 세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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